아시카가 요시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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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1358년에 태어나 1408년에 사망한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이다. 그는 남북조 시대를 통일하고 명나라와 교류하며 기타야마 문화를 꽃피우는 등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요시미쓰는 권력을 강화하고, 겐지 장자, 태정대신을 역임하며 공무 양면에서 정점에 섰다. 그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고 감합 무역을 시작했으며, 금각사를 건립하고 노(能) 연극을 후원했다. 말년에는 쇼군직을 아들 요시모치에게 물려주고 은거했으나, 그의 사후 무로마치 막부는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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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미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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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아시카가 요시미쓰 |
일본어 | 足利 義満 |
로마자 표기 | Ashikaga Yoshimitsu |
출생 | 1358년 9월 25일 |
사망 | 1408년 5월 31일 |
관직 | |
쇼군 | 재임 기간: 1368년 - 1394년 이전: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다음: 아시카가 요시모치 |
가족 | |
배우자 | 정실: 히노 나리코 측실: 히노 야스코 기타 |
자녀 | 아시카가 요시모치 아시카가 요시노리 |
부모 |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어머니: 기노 요시코 |
생애 | |
어린 시절 이름 | 춘왕 (春王) |
관위 | 종5위하 정5위하 좌마두 정이대장군 종4위하 참의 좌근위중장 종3위 권대납언 우근위대장 종2위 우마료 어감 종1위 내대신 좌대신 장인별당 후엔유인 별당 겐지 장자 준삼궁 준나 장학 양원 별당 태정대신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제3대 정이대장군 재임 기간: 오안 원년 12월 30일 (1369년 2월 7일) - 오에이 원년 12월 17일 (1395년 1월 8일) |
씨족 | 아시카가 쇼군가 |
형제 | 센주오 요시미쓰 가시와데라 세이소 미쓰아키라 데이요 소키 호쿄지덴 |
정실 | 히노 나리코 |
계실 | 히노 야스코 |
측실 | 후지와라 게이코 가스가노 쓰보네 기타 |
자녀 | 존만 요시모치 요시쓰구 요시노리 호손 고잔 에이류 다이가쿠지 요시아키 가지이 요시쓰구 기타 |
사후 정보 | |
법명 | 도유 (道有) 도기 (道義) |
계명 | 로쿠온인 덴잔 도기 (鹿苑院天山道義) |
묘소 | 상국사탑두녹원원 |
시호 | 공헌왕 (恭献王) |
신호 | 해당 없음 |
기타 | |
관련 사항 | 금각사 건립 |
2. 생애
1368년 제3대 쇼군으로 취임한 이후, 호소카와 요리유키 등의 보좌를 받으며 성장하여 점차 쇼군으로서의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마가와 사다요를 파견하여 규슈 지역을 평정하고,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유력 슈고 다이묘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며 막부의 중앙 집권을 추진했다.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1392년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대립하던 조정을 고코마쓰 천황 아래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이는 60년 가까이 이어진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공고히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10] 1378년에는 교토 기타코지 무로마치(北小路室町)에 '하나노고쇼(꽃의 어소)'라 불리는 새로운 쇼군 저택을 건설했는데, 이 저택의 위치가 무로마치 막부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15]
1394년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퇴하여 출가했으나, 오고쇼(大御所)로서 여전히 정치적 실권을 유지하며 막부 통치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이어서 1401년 공식적인 국교를 수립하고 감합 무역을 시작했으며, 1404년에는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았다.[12] 이는 일본 역사상 천황 외의 인물이 외국 군주로부터 국왕 칭호를 받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문화적으로는 교토 기타야마(北山)에 화려한 별장인 기타야마도노(北山殿)를 조성하여 기타야마 문화 시대를 열었다. 이 별장은 훗날 로쿠온지가 되었으며, 특히 금각(金閣)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노 연극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여 간아미와 제아미 모토키요 부자를 후원하며 노를 수준 높은 예술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14]
1408년 51세(만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사후 기타야마도노는 선종 사찰인 로쿠온지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금각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2. 1. 유년기부터 쇼군 권력 확립까지
1358년(쇼헤이 13년/엔분 3년) 8월 22일[45], 교토 가스가 히가시토인(春日東洞院)에 있는 막부 만도코로 집사 이세 사다쓰구의 저택에서 제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사망한 지 정확히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는 기 료코이며, 유아명은 하루오(春王)로 지어졌다.[23][24] 요시미쓰는 장남이 아니었지만, 아버지 요시아키라와 정실 시부카와 유키코 사이의 장남 아시카가 센주오가 일찍 죽고 유키코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하자, 요시미쓰가 적자로 취급받게 되었다. 유년기는 이세 사다쓰구의 저택에서 보냈다.[22]하루오가 어렸을 적 무로마치 막부는 남조와의 항쟁이 계속되는 혼란기였다. 또한 아시카가 가문 내부에서도 간노의 소란 이후 막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심화되고 있었다. 1361년(쇼헤이 16년/고안 원년) 12월에는 정쟁에서 실각한 호소카와 기요우지와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노리 등이 교토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때 어린 하루오는 겐닌지로 피신했다가 아카마쓰 노리스케의 보호 아래 그의 거성인 하리마국 시라하타 성으로 옮겨져 한동안 그곳에서 양육되었다. 이듬해 막부군이 교토를 탈환하자 하루오도 교토로 돌아왔는데, 귀경길에 셋쓰국 아마가사키 근처에 머물렀을 때 그곳의 경치를 마음에 들어 하며 "여기 경치가 좋으니 교토로 가져가자. 너희들이 메고 가라"고 명하여 가신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교토 귀환 후에는 새로 간레이가 된 시바 요시유키에게 양육받았다. 1366년(조지 5년) 12월 7일, 고코곤 천황으로부터 요시미쓰(義満)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종5위하에 서임되었다.[23][24]
1367년(조지 6년) 11월, 아버지 요시아키라가 중병에 걸리자, 요시아키라는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간레이로 임명하여 어린 요시미쓰의 후견을 맡기고 정무를 위임했다. 12월 7일 요시아키라가 사망하면서 요시미쓰는 불과 10세의 나이로 쇼군가의 가독을 이었다.[23][24]
1368년(쇼헤이 23년/오안 원년) 4월 15일, 요시미쓰는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가관역(加冠役, 에보시오야)으로 하여 성인식(겐푸쿠)을 치렀다.[23] 이듬해인 1369년(오안 2년) 12월 30일에는 조정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 선지를 받아 정식으로 제3대 쇼군에 취임했다. 초기 막부 정치는 간레이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중심으로 한 아시카가 일문의 슈고 다이묘들이 주도했으며, 요시미쓰는 이들의 보좌 아래 통치자로서 성장했다. 요리유키는 오안 대법을 실시하여 막부의 토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교토와 가마쿠라의 고잔 제도를 정비하여 종교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또한 남조의 주요 세력 기반이었던 규슈에 유능한 무장인 이마가와 사다요 (료슌)와 오우치 요시히로를 파견하여 남조 세력을 약화시키고 막부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 1370년(오안 3년)에는 조정으로부터 엔랴쿠지 등 사찰 세력(산문공인)에 대한 단속권을 부여받아 교토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1374년(분추 3년/오안 7년), 요시미쓰는 히노 나리코를 정실 부인으로 맞이했다. 1378년(덴주 4년/에이와 4년)에는 교토 내 저택을 산조보몬(三条坊門)에서 기타코지 무로마치(北小路室町)로 옮기고 이곳을 막부의 정청으로 삼았다. 이 저택은 훗날 '하나노고쇼(꽃의 어소)'라 불리게 되었으며, 이 위치 때문에 아시카가 막부를 무로마치 막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요시미쓰는 교토 시내의 행정권과 과세권을 조정과 막부로 나뉘어 있던 것을 막부로 일원화했으며, 슈고 다이묘들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 쇼군 직속 상비군인 호코슈를 창설하고, 실무를 담당할 관료 집단인 부교슈를 정비하여 쇼군 권력 강화를 꾀했다.
1382년(에이토쿠 2년)에는 쇼코쿠지 건립을 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자신의 선종 수행처로 탑두(塔頭)인 로쿠온인(鹿苑院)을 창건했다. 또한 1385년(시토쿠 2년) 도다이지와 고후쿠지 등 나라(奈良)의 주요 사찰들을 참배하고, 1388년(가케이 2년)에는 스루가국에서 후지산을 유람했으며, 1389년(고오 원년)에는 아키국의 이쓰쿠시마 신사를 참배하는 등, 각지를 시찰하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찰 여행이 항상 안전했던 것은 아니어서, 1388년 8월 17일 기이국 와카우라(和歌浦)의 다마쓰시마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남조 측 구스노키 마사카쓰의 습격을 받기도 했으나, 남조 정보에 밝았던 야마나 우지키요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히라오 전투).[26] 이는 당시 막부 권력이 완전히 안정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2. 2. 권력 강화와 남북조 통일
1379년(고랴쿠 원년), 호소카와 요리유키에 반대하는 슈고 다이묘 시바 요시유키와 도키 요리야스 등이 요시미쓰의 저택을 포위하고 요리유키의 파면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랴쿠의 정변). 요시미쓰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요리유키를 파면하고, 후임 간레이에는 시바 요시유키를 임명하며 막부의 주요 인사들을 시바 파로 교체했다. 비록 요리유키에게 추토령이 내려졌으나 다음 해 사면되어 숙로로서 막부 정치에 복귀했는데, 정변 이후 요시미쓰의 쇼군 권력이 더욱 확립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요시미쓰가 시바와 호소카와 두 파벌의 갈등을 이용하여 서로 견제하게 만들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후 요시미쓰는 도키 요리야스 사후 발생한 도키 씨의 내분에 개입하여 도키 가문을 토벌하기도 했다(도키 야스유키의 난).요시미쓰는 무가로서의 권력 강화뿐만 아니라 조정 내에서의 지위 상승에도 힘썼다. 1378년(에이와 4년) 3월에는 우근위대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의 고레야스 친왕 이후 쇼군이 우근위대장을 겸한 첫 사례였다. 5개월 뒤에는 곤다이나곤을 겸임했으며, 조정의 원로인 니조 요시모토의 지원을 받아 공가 사회의 일원으로 적극 참여하는 모습을 보였다. 1379년 8월, 도오치 도오야스 등 남조 측 무사에게 빼앗긴 사찰 영지의 반환을 요구하며 고후쿠지의 승려들이 가스가타이샤의 신목(神木)을 앞세워 교토로 들어와 강소를 벌였다(고랴쿠의 강소). 섭관가를 비롯한 후지와라 씨 계열 공경들은 신목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출사를 꺼렸으나, 요시미쓰는 자신이 미나모토 씨임을 내세워 출사를 계속했다. 나아가 1380년(고랴쿠 2년)에는 중단되었던 조정의 주요 행사(어유시, 사쿠분시, 가카이시)들을 대대적으로 부활시켜 오히려 승려들을 압박했다. 결국 같은 해 12월, 고후쿠지의 승려들은 막부로부터 도오치 토벌 약속 외에는 별다른 성과 없이 나라로 돌아가야 했고, 이는 역사상 처음으로 신목을 동원한 강소가 실패로 끝난 사례가 되어 사찰 세력에 큰 타격을 주었다.[27]
요시미쓰는 조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관위를 훨씬 뛰어넘어 내대신, 좌대신에 오르는 등 승진을 거듭했다. 1383년(에이토쿠 3년)에는 무가로서는 최초로 겐지 장자가 되었고, 준 삼후의 선지를 받아 명실상부하게 공가와 무가 양 세력의 정점에 섰다. 그의 위세는 섭관가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이름 한 글자(편휘)를 내려줄 정도로 강력해져 아무도 견제할 수 없었다. 또한 기존에 인이나 천황의 의사를 전달하던 덴소를 통해 직접 명령을 내림으로써 공무(公武) 일체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에 대해 산조 긴타다가 "선례를 초월한 존재"라고 평했듯이 공가 사회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요시미쓰의 가신이 되는 공경이나 도키와이노미야 미치히토 친왕처럼 애첩을 바치는 황족까지 나타났다.
유력 슈고 다이묘들에 대한 견제도 계속되었다. 1391년(메이토쿠 2년), 요시미쓰는 야마나 씨의 내분에 개입하여 당시 11개 국의 슈고를 겸하며 '로쿠분노이치 도노(六分一殿, 6분의 1 나으리)'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던 야마나 우지키요를 도발하여 거병하게 만들었다. 결국 같은 해 12월, 요시미쓰는 야마나 우지키요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다(메이토쿠의 난).
이러한 권력 강화를 바탕으로 요시미쓰는 오랜 숙원이었던 남북조 통일을 추진했다. 1392년(겐추 9년/메이토쿠 3년), 구스노키 마사카쓰가 근거하던 가와치국 지하야 성이 함락되는 등 남조의 세력은 전국적으로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 요시미쓰는 오우치 요시히로를 중개자로 내세워 남조 측과 교섭을 진행했다. 그는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에게 지묘인통과 다이카쿠지통이 교대로 천황위를 계승하는 것(양통질립)과 전국의 고쿠가 령(실제로는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을 다이카쿠지통 소유로 인정하는 것을 골자로 한 화평안을 제시했다. 고카메야마 천황이 이를 받아들여 삼종의 신기를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넘겨주면서 남조는 해체되었고, 58년간 지속된 조정의 분열은 마침내 종식되었다(메이토쿠의 화약). 이 남북조 합일은 요시미쓰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 중앙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지방 다이묘들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10]
남북조 통일 이후 요시미쓰의 권력은 더욱 확고해졌다. 1393년(메이토쿠 4년) 요시미쓰와 대립각을 세우던 고엔유 상황이 붕어하자, 1394년(오에이 원년) 12월(1395년 1월)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그러나 오고쇼로서 정치 실권은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같은 해 종일위 태정대신까지 승진한다. 무가가 태정대신에 임명된 것은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이어 두 번째였으며, 정2위 쇼군을 경험한 무가가 태정대신에 임명된 것은 처음이며, 또한 후의 시대를 포함해도 요시미쓰가 아시카가 가문 유일의 태정대신이 되었다. 1395년(오에이 2년) 6월에는 출가하여, 법명을 '''도기'''(道義)라 칭했다. 요시미쓰의 출가는 정2위 쇼군으로서 무가의 태정대신·준 삼후로서 공가의 정점에 달한 요시미쓰가 남은 사찰 세력을 지배하는 지위까지 얻으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요시미쓰의 출가에 즈음하여, 시바 요시유키를 비롯한 많은 무가와 공가, 황족의 도키와이노미야 미치히토 친왕까지 추종하여 출가하고 있다.
같은 해, 규슈 단다이로서 독자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이마가와 사다요를 파면한다.
1399년(오에이 6년), 서일본의 유력 다이묘·오우치 요시히로를 도발하여 요시히로가 사카이에서 거병한 것을 계기로 토벌하고(오에이의 난), 서일본에서 요시미쓰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은 배제되었다.
2. 3. 감합 무역과 기타야마 문화
요시미쓰는 젊은 시절부터 명나라에 대한 깊은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 1394년 연호 개정 때 명나라 태조 홍무제의 치세를 본받아 연호에 '홍(洪)' 자를 사용하려 했으나, 홍수가 연상되어 불길하다는 공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오에이로 결정되었다. 이에 요시미쓰는 불쾌해하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연호를 바꾸지 못하게 했다는 설이 있지만,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개원을 막았다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30] 어쨌든 그 결과 오에이 연호는 35년간 사용되어 메이지 시대 이전까지 가장 긴 연호가 되었다.요시미쓰는 명나라와의 공식적인 통교를 원했으나 초기 시도는 난관에 부딪혔다. 1374년의 사신 파견은 명나라 측이 남조의 가네요시 친왕을 '일본 국왕 료카이'로서 유일한 정규 통교 상대로 인정하고 있었고, 천황의 신하와는 통교할 수 없다는 방침 때문에 결실을 맺지 못했다. 1380년에는 '일본국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라는 명의로 교섭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천황의 신하라는 점과 국서의 수신인을 승상으로 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요시미쓰는 1395년 6월 태정대신 직을 사임하고 출가하여 천황의 신하가 아닌 자유로운 입장이 되었다.
1401년 '일본국 준삼후 미나모토노 도요시(日本國准三后源道義)'라는 명의로 하카타 상인 고이토미와 승려 소아를 사절로 명나라에 파견했다. 당시 가네요시 친왕의 세력은 이미 몰락했으므로, 명나라의 건문제는 요시미쓰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했다. 동시에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이 일본 국왕에게 수여되어 양국 간의 공식적인 국교가 수립되었다. 일본 국왕이 명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형식을 취한 감합 무역은 1404년부터 시작되었고, 요시미쓰는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진압하기도 했다. 한편, 1402년 음력 7월에는 조선의 태종이 왜구 소탕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양국의 우호 관계를 다지고자 하는 서한을 보내오기도 했다.[46] 하지만 견당사 폐지 이후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걷던 일본 조정 사회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신하가 되는 형태의 조공 무역에 대해 불만과 비판이 많았으나, 요시미쓰의 강력한 권세 앞에서는 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개인적인 기록으로 남기는 데 그쳤다.
1397년 요시미쓰는 사이온지 가문으로부터 교토 기타야마의 저택(기타야마 저, 北山弟)을 양도받아, 사리전(금각, 1399년경 완성 추정[31])을 중심으로 한 호화로운 산장(기타야마 전, 北山殿, 후의 로쿠온지)을 조성했다. 1399년 봄 이후 요시미쓰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32] 이 시기에 무가, 공가, 선종 양식이 융합되어 나타난 독특한 문화를 이 저택의 이름을 따 기타야마 문화라고 부른다. 기타야마 문화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금각사의 사리전(금각)과 1399년 교토 쇼코쿠지에 완공된 높이 약 109m(360척)의 팔각 칠층탑이 있다. 이 탑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4년 후 낙뢰로 소실되었다. 1404년 금각사 부근에 비슷한 규모의 기타야마 대탑을 건설했다는 설도 있다.[33] 금각사 사리전과 쇼코쿠지 칠층탑은 1399년경 완성되었으므로[31], 1401년부터 시작된 감합 무역의 이익으로 건설 비용을 충당한 것은 아니다. 다만, 1404년 건설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기타야마 대탑에는 감합 무역의 이익이 일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능 분야에서 요시미쓰는 사루가쿠(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간아미와 그의 아들 제아미 부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으며[14], 특히 제아미는 요시미쓰의 후원에 힘입어 노를 더욱 세련되고 격조 높은 예술로 승화시켰다.
2. 4. 최후
오에이 11년(1404년) 말경부터 요시미쓰는 자신에게 태상천황 존호를 내려주기를 조정에 요청하기 시작했다. 오에이 13년(1406년), 고코마츠 천황의 생모 산조 겐시가 사망하자, "천황 재위 중 두 번의 상(喪)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요시미쓰의 부인 야스코를 고코마츠 천황의 준모로 삼았다. 이로써 요시미쓰는 천황의 의부와 같은 지위를 얻게 되었다. 당시 관백 이치조 쓰네쓰구로부터 요시미쓰에 대한 존호가 검토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야스코는 이듬해 "호쿠잔인(北山院)"이라는 여원호를 받았지만, 요시미쓰에게 태상천황의 존호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요시미쓰가 외출할 때는 과거 상황이나 법황에게만 허용되었던 "삼의함(三衣筥)"이 놓이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다.오에이 15년(1408년) 4월 25일, 요시미쓰는 출가 예정이었던 아들 요시쓰구를 친왕의 예우로 원복시키고 참의까지 승진시켰다. 그러나 이틀 뒤인 4월 27일, 요시미쓰는 병으로 쓰러졌다. 4월 28일에는 병문안 온 사람들과도 만나지 못했고, 29일에는 의사 사카 시부쓰의 치료로 잠시 호전되는 듯했으나 5월 1일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다. 이에 쇼군 요시모치는 야마시나 노리후유를 사자로 보내 여러 사찰에 요시미쓰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명했고, 간레이 등도 다양한 기원 행사를 열었다. 5월 4일에는 위독해져 한때 숨이 멎었으나 저녁에 다시 소생하기도 했다. 5월 5일은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보였으나, 결국 5월 6일 신시(申時, 오후 3시~5시)가 지나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에 사망했다. 향년 51세(만 49세)였다.
요시미쓰의 법명은 로쿠온인 덴잔 도기(鹿苑院天山道義)이다. 그의 유해는 도지인에서 화장되어 쇼코쿠지의 탑두 사찰인 로쿠온인에 안장되었다. 이후 쇼코쿠지는 아시카가 쇼군 가문의 위패를 모시는 사찰이 되었으나, 덴메이 대화재로 소실되어 쇠퇴했다. 로쿠온인 역시 메이지 시대의 폐불훼석 정책으로 인해 폐사되면서 요시미쓰의 묘소 위치는 불분명해졌다. 다만 그의 위패는 아시카가 가문과 인연이 깊었던 린센지로 옮겨져 모셔졌다[35].
요시미쓰 사망 3일 후인 5월 9일, 조정은 그에게 '태상천황'의 존호를 추증했다. 그러나 아들 요시모치와 간레이 시바 요시마사 등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를 사퇴했고, 결국 존호 추증 자체가 없었던 일로 처리되었다. 이는 조정과 막부 사이에 사전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오산의 선승들은 자신들의 대단나(大檀那)였던 요시미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녹원원 태상천황'이나 '녹원천황' 등의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널리 통용되지는 않았다.
명나라의 영락제는 요시미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조문 사절을 일본에 보내 '공헌(恭獻)'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명과의 이러한 관계는 요시미쓰의 뒤를 이은 요시모치가 1411년 명나라 사신을 돌려보낼 때까지 지속되었다.
요시미쓰는 생전부터 아들 요시모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요시미쓰가 추진했던 대 조정·공가 정책, 수호 다이묘 통제 정책, 명과의 감합 무역 등 외교 정책을 포함한 여러 정책들은 요시모치 대에 이르러 대부분 부정되었다. 요시미쓰의 유산인 기타야마 제(北山第) 역시 금각(金閣)을 제외하고는 요시모치에 의해 철거되었다. 또한 요시미쓰가 특별히 아꼈던 아들 요시쓰구는 우에스기 젠슈의 난 당시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살해당했다. 요시미쓰 사후 교토 근처에 있던 그의 은퇴 별장은 로쿠온지라는 사찰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금박을 입힌 3층 사리탑인 '긴카쿠(金閣)'로 유명하여 사찰 전체가 긴카쿠지(金閣寺, 금각사)로 불리기도 한다. 현재 그곳에는 요시미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3. 연표
- 1368년: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쇼군으로 임명되고, 남조에서는 조케이 천황이 즉위했다.
- 1369년: 남조의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아시카가 막부에 투항했다.
- 1370년: 이마가와 사다요(료슌)가 규슈 평정을 위해 파견되었다.
- 1380년: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고카메야마 천황 아래의 남조 측에 다시 투항했다. 남조 군대는 어려움을 겪었다.
- 1382년: 남조 군대의 세력이 다시 회복되었다.
- 1385년: 남조 군의 거점 중 하나인 코가 영지가 함락되었다.
- 1389년: 이마가와 사다요에 의해 규슈 지역이 평정되었고, 요시미쓰는 그곳의 토지를 분배했다.
- 1390년: 구스노키 마사노리가 최종적으로 패배했다.
- 1392년: 고코마츠 천황 아래에서 북조와 남조가 화해하며 남북조 시대가 종결되었다(메이토쿠 화약).
- 1394년: 요시미쓰는 쇼군 직위를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에게 공식적으로 양도했으나, 실권은 계속 유지했다.
- 1397년: 규슈에서 일어난 봉기가 진압되었다.
- 1398년: 무로마치 막부의 정치 체제가 정비되었다.
- 1402년: 무쓰 국에서 발생한 봉기가 진압되었다.
- 1404년: 명나라의 영락제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았다.
- 1408년: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은퇴 별장은 로쿠온지(흔히 긴카쿠지(금각사)로 불림)가 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동상이 있다.
요시미쓰가 쇼군으로 재임했던 시기는 여러 연호(넨고)로 나뉜다.[16]
남북조 시대 남조 (메이지 칙령에 따른 정통 조정) | 남북조 시대 북조 (메이지 칙령에 따른 찬탈 조정) | 남북조 시대 이후 (통일 조정) | ||
---|---|---|---|---|
연호 | 기간 | 연호 | 기간 | |
쇼헤이 | 1346년–1370년 | 오안 | 1368년–1375년 | 메이토쿠 (1393년–1394년)‡ 오에이 (1394년–1428년) |
겐토쿠 | 1370년–1372년 | 에이와 | 1375년–1379년 | |
분추 | 1372년–1375년 | 고랴쿠 | 1379년–1381년 | |
덴주 | 1375년–1381년 | 에이토쿠 | 1381년–1384년 | |
고와 | 1381년–1384년 | 시토쿠 | 1384년–1387년 | |
겐추 | 1384년–1393년 | 가케이 | 1387년–1389년 | |
고오 | 1389년–1390년 | |||
메이토쿠 | 1390년–1393년‡ |
‡ 고카메야마 천황의 퇴위로 남조의 겐추 9년이 북조의 메이토쿠 3년으로 통합됨.
4. 평가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남북조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무로마치 막부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업적은 1392년 북조와 남조의 통일을 이룬 것이다. 그는 남조의 고카메야마 천황을 설득하여 일본 삼종신기를 북조의 고코마쓰 천황에게 넘기도록 함으로써 오랜 분열과 싸움을 끝냈다. 이는 막부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 지방 다이묘들의 세력을 억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0]
문화적으로는 기타야마 문화를 꽃피운 것으로 유명하다. 교토 외곽에 지은 그의 별장 로쿠온지의 금각은 이 시기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오늘날 금각사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노 연극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노의 대가인 제아미 모토키요를 후원하며 노가 예술적으로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14]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감합 무역을 시작하여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1404년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일본 국왕'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12] 이는 당시 일본에 천황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이례적인 일로, 근세 초 일본 지도자 중 중국으로부터 칭호를 받은 최초이자 유일한 인물이었다.[12]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 정책은 일본의 경제, 건축, 종교, 문화 등 여러 방면에 명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됐다.[11]
정치적으로도 요시미쓰는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1378년 교토의 무로마치 지역에 하나노고쇼라는 새로운 쇼군 저택을 건설했는데, 이는 이후 막부와 시대의 명칭('무로마치 막부', '무로마치 시대')이 유래하는 계기가 됐다.[15] 또한 무사 신분으로는 타이라노 키요모리 이후 약 230년 만에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에 오르며 막부의 위상을 높였다. 은퇴 후에도 실권을 놓지 않고 사망할 때까지 막부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사후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부각된다. 아들인 아시카가 요시모치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며, 요시미쓰 사후 요시모치는 아버지의 정책 상당수를 부정하고 명과의 관계도 단절했다. 요시미쓰가 남긴 기타야마 별장 역시 금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철거됐으며, 요시미쓰가 편애했던 아들 아시카가 요시쓰구는 모반 혐의로 살해되었다. 또한 요시미쓰 사후 조정에서 그에게 '태상천황' 존호를 추증하려 했으나, 요시모치 등이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기도 했다. 요시미쓰가 구축했던 강력한 막부 체제는 그의 사후 점차 약화되어 후대 쇼군들의 단명, 내부 분열, 반란 등으로 이어지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5. 논란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통치와 관련해서는 몇 가지 주요 논란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그가 황위 찬탈을 의도했다는 설과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설정 방식에 대한 비판이 있다.
첫째, 요시미쓰가 천황가의 권한을 넘겨받고 상황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등, 스스로 천황이 되거나 아들 요시쓰구를 천황으로 세워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는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 책봉을 받은 것과 연관 지어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며, 당시 조정과의 관계 속에서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는 반론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황위 찬탈설 문단 참조)
둘째, 명나라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일본 국왕' 칭호를 사용하고 조공 형식을 취한 것은 견당사 폐지 이후 독자 노선을 걸어온 일본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과 달라 국내 조정과 귀족 사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감합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었지만, 명나라 황제의 신하를 자처한 것은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는 인식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대외 관계 문단 참조)
5. 1. 황위 찬탈설
다나카 요시나리, 이마야 아키라 등은 요시미쓰가 황위 찬탈 의도를 가졌다는 설을 제기한다.찬탈설의 근거로는 요시미쓰가 보인 여러 행동이 제시된다. 그는 화압(서명)을 무가용과 공가용으로 구분해 사용하고, 부인 히노 야스코를 고코마쓰 천황의 준모(準母)로 삼아 여원호를 받게 했으며, 공가의 부인을 자신의 측실로 삼기도 했다. 또한 제사권, 서임권(인사권) 등 천황가의 여러 권한을 넘겨받았고, 사찰 참배 등에서는 상황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1408년 기타야마 저택에 고코마쓰 천황이 방문했을 때는 천황이나 원(院)만이 사용하는 운견연(雲肩縁) 무늬의 다다미를 사용했으며, 아들 요시쓰구의 원복 의식을 친왕에 준하는 형식으로 치렀다. 이러한 행동들은 요시미쓰가 황위 찬탈을 계획했기 때문이며,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은 것 역시 명의 외압을 이용한 찬탈 계획의 일환으로 해석된다[39]。
이마야는 요시미쓰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역성혁명 사상보다는 당시 유행했던 『야마다이 시』(耶麻台詩)라는 예언서를 이용하려 했다고 본다. 이 시는 천황이 100대(당시 북조 기준 계산법으로는 고엔유 천황에 해당)에서 끝나고, 원숭이나 개를 상징하는 인물이 등장한 후 일본이 멸망한다는 내용이다. ('백왕설')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우지만 (원숭이띠로 여겨짐)과 요시미쓰 (개띠)가 이 예언 속 인물이라는 해석도 있었다.
또한, 황위 찬탈은 요시미쓰 자신이 천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치천의 군이 되어 실권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했다. 즉, 총애하던 아들 요시쓰구를 천황으로 세우고 자신은 천황의 아버지로서 권력을 행사하며 천황가를 흡수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찬탈설에는 반론도 적지 않다. 당시 공가들의 일기 등에는 요시미쓰의 행동을 황위 찬탈 계획으로 기록한 내용이 없어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또한 계획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을 저군(왕위 계승자) 미히토 친왕이 어떠한 압박을 받았다는 기록도 없다. 후속 연구에서는 '일본 국왕' 칭호가 국내에서 조정을 대체하는 권위로 사용된 흔적이 없어, 조공 무역을 위한 직함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40][41]。
이시하라 히비로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그는 요시미쓰가 북조 천황의 권위 회복을 위해 조정 의례를 엄격하게 부흥시키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공가들을 처벌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고엔유 천황(후의 상황)과의 대립이 심했으며, 요시미쓰는 자신의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고엔유 천황을 배제하고 고코마쓰 천황의 보호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었다고 본다. 이시하라는 이마야의 설이 요시미쓰와 고엔유 천황의 개인적 갈등을 공무 관계 전체로 과도하게 확대한 해석이라고 비판한다[42]。
에노하라 마사하루에 따르면, 현재 학계에서는 요시미쓰의 공가화(公家化)가 조정 측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 결과라는 시각이 유력하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조정은 정치적 안정을 통해 경제적 지원을 얻고자 했고, 요시미쓰는 무가 내에서 아시카가 가문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기 때문에 서로의 목적이 일치했다는 것이다[43]。
요시미쓰 사후,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아버지를 태상천황으로 추증하려는 움직임을 중단시켰고, 자신에게 요시미쓰와 같은 예우를 하려는 공가들의 제안도 거절했다. 하지만 요시모치 역시 아버지의 조정 정책을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공가풍의 화압을 사용하고, 공가의 가문 상속 등에 관여했으며, 쇼코 천황의 어명을 변경시키는 등(이는 요시미쓰도 하지 못한 일이다)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즉, 천황과는 거리를 두면서도 조정에 대한 관여는 계속한 것이다.
설령 황위 찬탈 계획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는 요시미쓰 개인의 구상이었을 뿐 아들 요시모치나 간레이 시바 요시마사 등 주요 슈고 다이묘들은 동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왕권 찬탈설에 대한 비판이 이어지면서, 이 학설은 더 이상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것이 현재 학계의 평가이다.
5. 2. 대외 관계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젊은 시절부터 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1394년 연호를 새로 정할 때, 명나라 태조 홍무제의 치세를 본받아 연호에 '홍(洪)' 자를 넣으려 했으나, '홍' 자가 홍수를 연상시켜 불길하다는 공가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오에이로 결정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요시미쓰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연호를 바꾸지 못하게 했다는 설이 있으나[30],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개원을 막았다는 반론도 있다. 어쨌든 오에이 연호는 메이지 이전까지 가장 긴 연호가 되었다.요시미쓰는 명과의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을 원했다. 그러나 1374년에 보낸 사절은 명나라가 남조의 가네요시 친왕을 '일본 국왕'으로 인정하고 있었고, 천황의 신하와는 교류할 수 없다는 방침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80년에는 '일본국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시미쓰'라는 명의로 다시 교섭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천황의 신하라는 점과 국서의 수신인을 승상으로 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요시미쓰는 1395년 태정대신 직을 사임하고 출가하여 천황의 신하라는 제약에서 벗어났다.
1401년, 요시미쓰는 '일본국 준삼후 미나모토노 도요시(日本國准三后源道義)'라는 명의로 하카타 상인 고이토미와 승려 소아(祖阿)를 사절로 명나라에 파견했다. 당시 가네요시 친왕의 세력은 이미 약화되었기에, 명나라의 건문제는 요시미쓰를 일본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와 함께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을 수여받으면서 양국 간의 공식적인 국교가 수립되었다. 1404년부터는 일본 국왕이 명나라 황제에게 조공하는 형식의 감합 무역(니치묘 무역)이 시작되었으며,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왜구를 단속하기도 했다.
1402년 음력 7월에는 조선의 태종이 전년도 왜구 소탕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 앞으로 교린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내용의 서한을 요시미쓰에게 보내왔다.[46]
견당사 폐지 이후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어왔던 일본의 조정과 귀족 사회에서는 요시미쓰가 명나라 황제의 신하를 자처하며 조공 무역을 하는 것에 대해 불만과 비판이 많았다. 하지만 요시미쓰의 강력한 권력 앞에서는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내지 못하고 개인적인 기록으로만 남길 뿐이었다. 명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 시기 일본은 경제, 건축, 철학, 종교, 문학 등 여러 방면에서 명나라의 영향을 받았다.[11] 요시미쓰는 1404년 명나라 영락제로부터 다시 "일본 국왕"으로 인정받았다.[12]
6. 가계도
-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제2대 쇼군)
- '''어머니''': 키노 요시코 (측실, 키노 료시라고도 함)
- '''형제자매'''
- * 센주오
- * 하쿠테이 세이소
- * 아시카가 미쓰아키라
- * 테이요 소키
- * 여자(호쿄지노 덴. 케이쇼?)
- '''배우자 및 자녀'''
- * '''정실''': 히노 나리코 (히노 토모코라고도 함, 히노 토키미츠의 딸)
- ** 딸 1명
- * '''계실''': 히노 야스코 (히노 스케야스의 딸)
- * '''측실'''
- ** 후지와라 케이시 (아키 호겐의 딸)
셋째 아들: 아시카가 요시모치 (제4대 쇼군)
다섯째 아들: 아시카가 요시노리 (제6대 쇼군)
여자(이리에노 덴 세이센) (이리에 주젠?)
- ** 카가노 쓰보네 (쵸카이 법인 딸)
장남: 손만 (토잔 세이시)
차남: 호토 노 와카키미 (호도)
- ** 카스가노 쓰보네 (셋쓰 씨, 셋쓰 요시히데의 딸)
넷째 아들: 아시카가 요시츠구
- ** 네이후쿠인 덴 (네후인)
여자(다이지인 세이큐) / 다이지인 세이쇼
- ** 후지와라 세이코 (쿄코) (원래 아시카가 미쓰아키라의 정실이었으나 요시미쓰의 측실이 됨)
카지이 요시츠구
아들
다이진인 세이
- ** 후지와라노 토모코
기쇼
카지 요시아키
- ** 케이운안슈 (케이준인, 오이노미카도 후유무네의 딸)
여자(코쇼인 손큐) / 코쇼인
- ** 타카하시노 덴 (타카하시도노)
- ** 이케지리노 덴 (이케가미도노)
딸 1명
코잔 에이류
- ** 후지와라 료코
아들 (요시츠구・요시노리와 출생년도 동일)
여자(다이지인 세이쇼?)
- ** 이치죠노 츠보네
- ** 미나모토 하루코
- ** 히가시노 카타
- ** 타이노 카타
- ** 호쿠무코 삼품 츠보네
- ** 보몬노 츠보네
- ** 우지노 덴
여자
- '''생모 불명의 자녀'''
- * 일곱째 아들: 닌나지 호손
- * 여섯째 아들: 다이카쿠지 요시아키
- * 혼가쿠인 미츠모리
- * 여자(홋케지 손준)
- * 여자(롯카쿠 미츠츠나의 정실)
- * 여자(셋슈인 덴)
- * 여자(호쿄인슈)
- '''양자'''
- * 시바 요시시게
- * 산포인 만사이
- * 조센
7. 대중문화 속의 아시카가 요시미쓰
=== 소설 ===
- 기타가와 겐조 『아지랑이의 깃발』(신초샤/신초 문고, 1991년)
- 야마다 후타로 『야규 쥬베이 죽다』(쇼가쿠칸 문고, 1992년)
- 아베 류타로 「바사라 장군」(분게이슌주 『무로마치 화전』/분슌 문고 『바사라 장군』수록, 1995년)
- 히라이와 유미에 『사자의 자리 아시카가 요시미쓰전』 (주오코론신샤/분슌 문고, 2000년)
- 아사마쓰 겐 『잇큐 암야행』(2001년, 고분샤 문고)
- 쿠지라 토우이치로우 『엉뚱 탐정 잇큐 씨 금각사에 밀실』(2000년 4월 쇼덴샤 논 노벨 / 2002년 9월 쇼덴샤 문고)
- 아베 아키코 『무로마치 료란 요시미쓰와 제아미와 요시노의 공주』(슈에이샤 문고, 2018년)
- 마나베 아키토 『만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총리가 된다면』(2021년, 선마크 출판)
=== 영화 ===
- 『만약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총리가 된다면』(2024년, 출연: 코테 신야)
=== 텔레비전 드라마 ===
- 『잇큐 씨』(2012년, 후지 TV, 출연: 히가시야마 노리유키)
=== 만화 ===
- 사카구치 히사시 『앗칸베에 잇큐』(고단샤, 1993년 - 1996년)
- 소니시 켄지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지츠교노니혼샤, 제4권 수록)
=== 애니메이션 ===
- 『잇큐 씨』(1975년-1982년, 토에이 애니메이션 제작) - 장군으로서 요시미쓰(성우: 키톤 야마다)가 등장한다. 사극에 근거한 유능한 인물·잇큐와 대립하는 입장으로서의 측면도 보이지만, 전반적으로 제멋대로이고 덜렁거리는 면도 많은 코믹한 느낌으로 묘사된다.
- 『고양이 고양이 일본사』(E 텔레비전, 조커 필름즈 제작, 성우: 코바야시 유우, 할아버지 아시카가 다카우지 역할도 동일)
- 『개왕』(2022년 공개된 애니메이션 영화. 원작은 후루카와 히데오의 소설 『헤이케 이야기 개왕의 권』(2017년, 가와데 쇼보 신샤), 성우: 에모토 타스쿠)
=== 컴퓨터 게임 ===
- 『칭기즈 칸 IV』(코에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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筑後河を下り菊池正観公の戦いし処を過ぎ感じて作有り
http://www.shigi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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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読史余論抄
http://lovekeno.iza-[...]
2024-06-24
[20]
웹사이트
南方紀伝1411
https://web.archive.[...]
2024-06-24
[21]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第5版
株式会社三省堂
[22]
서적
足利義満
吉川弘文館
[23]
논문
[24]
서적
朝日 日本歴史人物事典
朝日新聞社
[25]
서적
中世日本の政治と文化
思文閣出版
[26]
서적
後太平記
[27]
서적
二条良基研究
笠間書院
[28]
서적
室町幕府の政治と宗教
塙書房
[29]
서적
十四世紀の歴史学 新たな時代への起点
高志書院
[30]
논문
正長の改元
[31]
서적
室町幕府論
講談社
[32]
논문
足利義満の宗教空間
森話社
[33]
뉴스
金閣寺・敷地内から装飾品出土、七重塔「北山大塔」部材か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6-07-08
[34]
서적
室町安土桃山時代医学史の研究
吉川弘文館
[35]
잡지
臨終の日本史その死の瞬間
新人物往来社
[36]
서적
後愚昧記
[37]
서적
兼宣公記
[38]
서적
教言卿記
[39]
서적
南北朝の動乱
中央公論社
[40]
서적
前近代の国際交流と外交文書
吉川弘文館
[41]
서적
中世の国家と在地社会
校倉書房
[42]
서적
室町時代の将軍家と天皇家
勉誠出版
[43]
뉴스
(제목 없음)
読売新聞
2017-02-01
[44]
문서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명나라 황제에게 일본국왕 원도의(日本国王源道義)라는 봉호로 일본국왕에 책봉되었고, 그 후 이 명칭은 아사카가 막부 쇼군의 외교 칭호로 사용되었다.
[45]
문서
이하 월일은 모두 음력으로 표기한다.
[46]
웹사이트
태종실록 (1431) 1권, 태종 1년 6월 12일 기사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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